그동안 베트남에서 공영 방송 VTV를 통해 한류가 확산됐다면 이제 넷플릭스(Netflix), 비온(VieON), 유튜브(YouTube)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더욱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가 소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베트남에서 새로운 소비 경향이 형성되고 있어 한류의 경제적 파급효과 또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 한-베 외교 관계 수립 32주년 그리고 베트남에서 한류의 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현지에서 느끼는 한류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베트남에서는 해외 드라마 중 한국과 중국의 드라마가 가장 많이 방영되고 있다. 2016년을 전후해 인도, 필리핀, 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됐다. 최근에는 튀르키예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데, 2022년에 9편이, 2023년에 4편이 황금 시간대에 방영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베트남 방송에서 다양한 국가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베트남 사람들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편성된 한국 드라마의 편수를 합산해보면 2019년 12편(929부작), 2020년 17편(1,088부작), 2021년 12편(756부작), 2022년에는 10편(415부작)으로, 주로 장기간 방영되는 일일연속극이 많았다. 2023년에 방송된 작품은 <두 번째 남편>과 <비밀의 집> 단 2편뿐이었지만, 이들의 제작 편수는 총 274부작으로, 이 또한 1년 중 4분의 3 이상 방영됐다.
넷플릭스 베트남 ‘주간 Top 10’을 보면 베트남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엿볼 수 있다. 2021년 6월 28일부터 2024년 3월 3일까지 베트남 넷플릭스 ‘주간 Top 10’ 진입 횟수 상위 20위를 보면 중국 1편, 일본 2편, 베트남 1편 등 4편을 제외한 16편이 한국 드라마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진입 시점이다. 넷플릭스에서 <응답하라 1988>이 공개된 후 1∼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10주 이상 연속 ‘주간 Top 10’에 진입한 것이 세 차례나 된다. 2021년 6월 28일부터 9월 20일까지 13주 동안, 2021년 11월 8일부터 2022년 1월 17일까지 11주 동안, 2022년 8월 29일부터 12월 5일까지 15주 동안 10위에 올랐다. 2021년 코로나19로 힘든 시절을 보내며 가족애와 ‘힐링’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를 찾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팬데믹이 종식되고 사람들이 일상에 복귀한 시점인 2022년 8월에 <응답하라 1988>이 또다시 15주 연속 ‘주간 Top 10’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의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n차 관람’을 한 시청자가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 <응답하라 1988>은 베트남 내 한국어 전공자들이 ‘드라마를 통한 한국어 학습’ 교보재로도 삼을 만큼 베트남 젊은 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비록 1988년의 한국과 지금의 베트남 경제 상황은 다르지만 1988년 당시 한국의 가족 정서와 현재의 베트남 사람들의 가족애가 부합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불시착>은 베트남 TV에서는 방송되지 않았지만 2019년 12월 14일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이 드라마 또한 검색이 가능한 2021년 6월 28일부터 33회 ‘Top 10’에 진입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베트남인이 시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랑의 불시착>의 영향으로 드라마 촬영지인 스위스 이젤발트 브리엔츠 호수는 베트남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될 정도로 이 드라마는 베트남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위의 두 작품 외에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1과 2, <환혼>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모두 인기가 있었다. <더 글로리>는 한국에서는 19주간, 베트남에서는 21주간 ‘주간 Top 10’에 들었고, 한국에서 7주간, 베트남에서 8주간 1위에 올랐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시 한국과 베트남에서 모두 인기가 있었던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16주간, 베트남에서는 13주간 연속 ‘주간 Top 10’에 진입했으며, 1위는 한국에서 8주간, 베트남에서 7주간 지속됐다.
이처럼 넷플릭스 ‘주간 Top 10’에 진입한 드라마를 살펴보면 베트남 사람들이 선호하는 요소가 가족, 휴머니즘, 힐링, 일상생활과 정의 등임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이 6주간 ‘주간 Top 10’에 올랐고,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역시 한국과 동일하게 5주간 ‘주간 Top 10’에 포함됐다.
영국에서 제작한 넷플릭스의 <MH370: 사라진 비행기>는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실종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수색 과정에 참여한 베트남의 협조와 노력이 부정확하게 그려져 이에 베트남 시청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베트남 정보통신부는 넷플릭스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2023년 4월 초 관련 장면이 부분 삭제됐다. 2020년에는 베트남과 중국 간 다툼이 있는 남중국해(베트남에서는 동해로 표기)에 대한 지도상의 표기 오류 문제로 넷플릭스에 공개된 중국 드라마 <치아문난난적소시광(致我们暖暖的小时光)>와 2021년 호주 드라마의 <파인 갭(Pine Gap)>의 방영이 중단됐다. 미국 드라마 <마담 세크리터리(Madam Secretary)>는 베트남 지명 ‘호이 안(Hoi An)’을 중국의 ‘푸 랑(Phu Lang)’으로 표기해 전 편이 삭제되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이 왜곡됐다는 이유로 전 편이 삭제됐다. 영화나 드라마의 역사 왜곡과 정치적인 논란은 ‘한류’에 관심이 없는 베트남 국민에게도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므로 제작 과정 전후 이러한 문제들을 반드시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번역이다. 드라마와 영화를 번역할 때는 그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번역가들에게는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당사국의 정서에 부합하는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해박한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다. 단어 하나로 현지 시청자들의 깊이 있는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오해를 야기해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SKY 캐슬>은 베트남에서 <하늘의 성(Lâu Đài Trên Không)>으로 번역됐다.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은 ‘SKY’라는 단어가 ‘하늘’만이 아니라 한국의 명문대로 거론되는 서울대(S), 고려대(K), 연세대(Y)를 의미하기 때문에 영어 표기 그대로 <SKY 캐슬>을 사용하거나, <명성의 성(Castle of Fame)>과 같이 내용에 맞게 번역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Chong, 2019. 1. 20.). 최근 한국과의 교류가 증가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짐에 따라 드라마, 영화의 미진한 번역은 작품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되고 있다.
흥행 1위를 기록한 베트남 영화 <더 하우스 오브 노 맨(Nhà bà Nữ)>는 CJ ENM이 제작해 4,596억 동(약 2천만 달러)의 수익으로 베트남 영화 사상 최고 수익을 올린 작품이 됐다. 롯데컬처웍스가 제작한 <Last Wife(Người vợ cuối cùng)>는 1,000억 동(약 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 6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는 베트남계 미국인 빅터 부(Victor Vũ)와 케이티 응우옌(Kaity Nguyễn)이 각각 감독과 주인공을 맡아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2024년 2월부터 현재까지 넷플릭스에서 7주 연속 ‘주간 Top 10’에 진입해 있다. 롯데컬처웍스가 제작 투자한 또 다른 영화인 <Blood Moon Party(Tiệc trăng máu)>는 한국 영화 <완벽한 타인>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개봉 8주 만에 24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누적 매출 1,720억 동(약 697만 달러)을 기록했다. <퓨리(Hai Phượng)> 역시 롯데엔터테인먼트 베트남 법인이 배급사로 참여해 미국과 베트남에서 동시 개봉했고, 약 1,400억 동(576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며 2019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돼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CJ ENM과 트란 탄(Tran Thanh) 감독은 <더 하우스 오브 노 맨>의 성공에 이어 <마이(Mai)>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2024년 2월 10일 베트남과 미국, 캐나다 등에서 개봉한 후 27일 만인 2024년 3월 8일까지 620만 관객을 동원하며 5,450억 동(2,200만 달러)을 기록했다. 이미 2023년 최고의 흥행작인 <더 하우스 오브 노 맨>의 수익 4,596억 동을 넘어섰다. 더구나 선풍적인 인기로 18세 이상 관람인 <마이>를 관람하려는 청소년 관람객이 증가하자 검열이 강화되기도 했다(Thach, 2004. 8. 3.).
이처럼 베트남 영화가 성공을 이룬 배경에는 해외에서 영화를 전공한 감독의 베트남 귀국과 한국의 적극적인 제작 투자에 따른 작품성의 향상, 그리고 베트남의 자국 영화산업 보호 정책이 있다. 그 덕분에 베트남 내에서는 베트남 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2023년 12월 초,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Wish)>, 한국 영화 <30일>과 동시 개봉한 베트남의 <Black Rose(Chiếm đoạt)>(KBS Media 제작)은 앞선 두 작품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2023∼2024년 베트남 영화가 선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베트남 영화시장에서 수입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높은 편이다. 미국 작품이 49%, 베트남 작품이 19%를 차지하며, 그 뒤로는 중국(9%), 한국(6%), 일본(5%) 등 아시아 국가 순이다. 2023년 한국 영화는 베트남 구글 검색 10위권과 베트남 영화 수익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2023년 베트남 영화 수익 1∼6위는 베트남, 그리고 7∼8위는 미국, 9∼10위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차지했다.
베트남의 4대 주요 영화관인 CGV, 롯데시네마, BHD, 갤럭시 시네마는 베트남 전역에 183개 영화관을 가지고 있다. 이 중 CGV가 82개, 롯데시네마가 45개의 영화관으로 전체의 71%를 점유하고 있어 한국은 베트남의 영화산업 육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상영관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도심에서 떨어진 신도시 개발로 주변 지역 거주자들의 엔터테인먼트 시설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신도시의 대형 쇼핑몰과 연계된 영화관이 늘고 있고, 이러한 신규 영화관의 증가가 다시 영화산업의 활성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3년 7월 29일부터 이틀간 2회 공연된 블랙핑크의 하노이 콘서트는 베트남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콘서트 표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만 10만 명 이상이었으며 암시장도 성행했다. 이에 베트남 공영 방송 VTV에서는 암시장에 대한 경고 기사를 3분간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최근 베트남에서는 한빈과 하니의 성공이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으로 성공할 기회에 대한 장벽이 낮아지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 연습생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기회이고,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그 경험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며 이들의 도전은 케이팝 성공을 넘어 베트남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도 영감의 원천이자 강력한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Yen, 2022. 8. 7.).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하는 OST로는 한류의 시작인 2002년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부터 <태양의 후예>, <도깨비>, 그리고 최신작인 <더 킹: 영원한 군주> 등 다양한 작품의 곡들이 있다. 노래방을 좋아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케이팝 외에도 이러한 한국 드라마 OST를 애창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2022년 7월 16일 베트남 중부 달랏대학교에서 ‘K-트로트 페스티벌 2022(K-Trot Festival 2022)’가 개최됐다. 베트남의 한인 잡지인 《라이프플라자》와 K 마켓(K market) 등 여러 한국 기업의 후원으로 열린 이 대회는 한국과 베트남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며 베트남에서 한국의 트로트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후 2023년 4월 15일에는 호찌민시의 홍방국제대학교(HIU)에서 ‘K-트로트 페스티벌 2023(K-Trot Festival 2023)’이 열렸고, 이 행사에 호찌민시를 포함한 남부 지역의 13개 대학이 참여했다.
이제 베트남 택시에서 케이팝을 듣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간혹 택시를 타면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며 유튜브에서 트로트를 틀어주는 기사도 있다. “이런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아이돌 노래보다는 이런 흥이 많은 곡을 좋아해서 일하며 자주 들어요”라고 한다. 베트남에서 ‘K-트로트’ 행사가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확대된다면 케이팝과 함께 트로트가 한국과 유사한 정서를 가진 베트남 사람들에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돌의 노래는 기획사의 체계적인 홍보로 세계 각국에 전파되지만, 트로트의 경우 그러한 시스템적 지원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려 및 개선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 관계와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해외 문화의 수용은 언제나 잠재된 불안 요소를 품고 있다. ‘한류’를 선호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류’는 한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지만, 한국에 부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베트남 자국의 문화를 침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도 해 부정적 효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한류’라는 용어가 국내보다 한국 문화 수용국과 수용자 입장에서의 용어라고 가정할 때 ‘한류’와 ‘한국 문화 K culture’ 중 국가 브랜드로 어느 것이 적절할지, 아니면 ‘한국 문화 수용자 측면도 고려한 용어’가 따로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베트남 시청자들이 과거 VTV를 통해 일방적으로 외국 드라마를 수용했다면 이제는 넷플릭스와 OTT를 통해 타국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주체로서 작품을 선택할 때 국가보다는 장르와 작품성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문화가 현지에서 더욱 깊숙이, 그리고 광범위하게 수용될 수 있는 정책의 변화가 필요한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한류’ 지원 정책, 해외 홍보, 현지 행사 등의 기획 시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한국의 시각이 아닌 현지 수용성을 고려한 기획과 용어 사용 등이 필요하다.